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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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천량 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 시기, 무능한 지휘관 원균의 지휘 하에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여 궤멸된 해전이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원균의 무능한 지휘와 전략 부재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100척이 넘는 전선과 주요 지휘관들을 잃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남해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전라도까지 왜군에게 침략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며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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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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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정유재란 |
시기 |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
장소 | 경상도 거제도 인근 칠천도 |
결과 | 일본 수군의 대승, 조선 수군 대부분 궤멸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및 지도자 | |
조선 | 원균 이억기 최호 배설 김완 배흥립 이응표 우치적 조계종 송여종 원전 |
일본 |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간 미치나가 |
병력 규모 | |
조선 | 거북선 3척 판옥선 160여척 |
일본 | 전선 500~1,000여 척 병력 140,000명 |
피해 규모 | |
조선 | 판옥선 140여척 침몰 (거북선 3척 포함) 지휘관 포함 조선 수군 2만여 명 궤멸 김완 포로로 끌려감 배설 전선 12척 이끌고 탈영 |
일본 | 전선 8척 침몰 100여 명 사상(추측) 가토 요시아키 왼팔 부상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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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 부산을 재침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고, 8월 20일(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 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을 명하면서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삼도를 점령하려면 보급이 원활해야 했는데, 조선은 의도적으로 도로를 놓지 않아 수송은 강과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문록의 역 이후,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거제도 인근 해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강화 협상이 결렬되고 경장의 역을 위해 부산 부근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순신은 수군 단독 공격의 위험성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당쟁과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이순신이 제거되면서, 조선 수군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2. 1.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7년 3월 1일 (음력 1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을 재침하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3]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고, 8월 20일 (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종교 문제와 일본 내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미 가토 기요마사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4]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출전을 미루었으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펼쳤다.[4] 이후에도 원균은 소수의 적을 보고도 도주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쳐서 출전시켰다.[5]
2. 2. 원균의 지휘 능력 부재와 조선 수군의 약화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전략적인 식견과 경험이 부족했다. 3월 29일 장계를 통해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펼치며 출전을 거부했고,[3][4] 소수의 적을 보고도 도주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결국 도원수 권율은 원균의 무능함과 조정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를 괘씸히 여겨 곤장을 쳐서 강제로 출전시켰다.[5] 이는 원균의 리더십 부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순신 시절 강력했던 조선 수군은 원균의 지휘 아래 급격히 약화되었다. 원균은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출항했으나,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후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고하시 무네마스·쓰쿠시 히로카도 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3. 칠천량 해전의 전개
1597년 8월 26일(음력 7월 14일) 원균[6]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포 인근에서 적을 추격했으나,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아 판옥선 12척을 잃고, 이후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많은 전선을 잃었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려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원균의 동생 원전(元塼)은 형을 대신해 싸우다 전사했다.
거제도 서쪽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야습을 당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원균은 지휘 대신 선상에서 폭음을 했다고 한다.[7]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고, 원균은 도주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전사했다. 가리포첨사 이응표는 주장인 이억기를 구원하지 않고 도주했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한산도의 군수물품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강화 협상이 결렬된 후, 부산 인근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단독 공격의 위험성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당쟁과 원균의 참소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역시 공격 명령에 소극적이었다.
1597년 6월 18일,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령으로 원균은 함대를 출격시켰으나, 6월 19일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일본군과 교전 후 피해를 입고 한산도로 후퇴했다. 7월 초, 원균 함대는 다시 출격하여 7월 7일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고하시 무네마스·쓰쿠시 히로카도 군의 공격을 받았다.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엄하게 질책하고 장벌에 처했다.
7월 14일, 한산도 본영을 출격한 원균 함대는 15일 밤 거제도와 칠천량 (현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에 정박했다. 일본군은 이 정보를 얻고 수륙 협공 작전을 세웠다.
3. 1. 칠천량으로의 후퇴와 일본군의 기습
1597년 8월 26일(음력 7월 14일), 원균[6]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포 근해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판옥선 12척을 잃었다. 이후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더 많은 전선을 잃었다. 실록은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했다고 기록했고,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는 일본 육군 수송함대 병력이 반격한 것으로 나와있다.[2]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려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원균은 400명의 병사를 버리고 도주했는데, 이는 1597년 2월 이순신이 가덕도에서 포로를 구출하고 화친을 이끌어낸 것과 대조적이다. 이 과정에서 원균의 동생 원전(元塼)은 형을 대신해 싸우다 전사했다.[2]
거제도 서쪽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게 야습을 당한 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원균은 제대로 지휘하지 않고 선상에서 폭음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상륙한 조선 수군은 반격하지 않고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조방장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조선 수군이 기습 속에서도 지휘권을 유지하며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휘를 무시하고 퇴각한 배들은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향했다. 선전관 김식의 초기 보고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진 수군 장수들 다수가 생존해 있음이 확인되어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춘원포로의 퇴각과 상륙이 원균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을 잃었어도 장수와 수군들이 전멸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2]
일본군은 수륙 양면 협공 작전을 계획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병력 2,000명을 거제도로 수송하여 조선 수군을 내려다보게 했다. 8월 28일 밤, 500척의 일본 함대가 해협으로 진입하여 공격했고, 동이 틀 무렵 거의 모든 조선 배가 파괴되었다.
도도 다카토라 등 일본 수군은 해상에서 공격하고, 육상 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압도하여 수천 명을 베고 다수를 바다에 빠뜨렸으며, 160여 척을 포획하고 해적선을 모조리 소각했다.
3. 2. 조선 수군의 궤멸적 패배
1597년 8월 26일(음력 7월 14일), 원균[6]은 100척이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 명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 인근에서 적을 추격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아 판옥선 12척을 잃었고, 9일에는 적의 반격을 받아 많은 전선을 잃었다. 《실록》은 아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고 비판했고,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는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가 반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얻으려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했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가덕왜성을 공격하여 요시라가 직접 포로를 풀어주고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과정에서 원균의 동생이자 부장인 원전(元塼)은 형을 대신해 싸우다 전사했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퇴각했다. 원균은 제대로 지휘하지 않고 선상에서 폭음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 않고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조방장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아군이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수군이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지휘권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를 무시하고 퇴각한 배들은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향했고, 선전관 김식의 초기 보고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진 수군 장수들 다수가 체찰사 이원익의 조사 결과 생존해 있음이 확인되어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통해 춘원포로 퇴각, 상륙한 것은 원균의 명령이었으며,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을 잃었어도 장수와 수졸들이 전멸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다. 원균의 동생 원전은 형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재직했는데 형과는 달리 배 안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김완은 진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2]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했다. 그러나 가리포첨사 이응표는 주장인 이억기를 구원하지 않고 도주하여 훗날 책임 추궁을 받게 된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8]을 포함하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모든 판옥선이 침몰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조선 수군이 붕괴되면서 남해의 제해권이 넘어가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인 《정한위략》에 따르면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100여 척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고려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이다. 이는 일본이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했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려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 함대에 왜선 한 척이 접근해 조총 한 발을 쏘자 조선 수군 함대가 놀라 도망치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기록했다.
4. 해전의 결과 및 영향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제해권을 상실하고 일본군이 전라도를 향해 진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인 원균, 이억기, 최호 등이 전사하였다.[9]
4. 1. 이순신의 복귀와 조선 수군의 재건
1597년 5월 16일(음력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출옥하여 남하, 6월 11일(음력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있던 순천에 도착했다.[9]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 이후, 조선 조정은 9월 3일(음력 7월 22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전력을 재편하고자 했다.[9]하지만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넘어가면서 육군의 지원이 어려워져 왜군이 전라도까지 침입하였다.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남해안의 제해권은 일본군에게 있었다.
1597년 8월 30일(음력 7월 18일) 이순신은 해안 지역을 직접 돌아본 후 대책을 세우겠다고 권율에게 요청하고 송희립 등 9명의 군관과 함께 현지로 떠났다.[9] 삼가, 단성, 진주를 거쳐 9월 2일(음력 7월 21일) 노량에 도착,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을 만나 패전 상황을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9] 한편, 배설은 칠천량 해전 직전 12척의 배를 이끌고 탈출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을 일부 보존하였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칠천량 해전은 조선과 일본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였다. 조선 수군의 궤멸적 패배는 임진왜란의 전황을 크게 바꾸었으며, 전쟁의 장기화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이 해전으로 이순신이 쌓아 올린 해상 우위를 잃고, 일본군에게 전라도 진격의 발판을 제공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큰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주었으며, 지휘부에 대한 불신을 야기했다. 하지만, 이 패배는 이순신의 재등장과 함께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의 승리로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고, 전라도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5. 1. 조선의 입장
한산도에 본영을 둔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출몰에 대응하고 있었다. 강화 협상이 결렬된 후, 부산 부근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순신은 단독 공격의 위험성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당쟁과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지위를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그 역시 공격 명령에 소극적이었다.[1]이원익의 명령으로 원균은 함대를 출격시켰지만, 일본군과의 해전에서 피해를 입고 한산도로 후퇴했다. 권율은 원균을 질책하고 벌을 내렸다.[1]
1597년 7월 14일, 조선 수군은 다시 출격하여 칠천량 (현 칠천도)에 정박했다. 일본군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수륙 협공 작전을 세웠다. 7월 16일, 일본 수군은 해상에서, 육상 부대는 육지에서 공격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압도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160여 척을 포획했다.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인 원균, 이억기, 최호는 전사하고, 배설만이 도주하여 조선 수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전라도를 향해 진격했다.[1]
5. 2. 일본의 입장
문록의 역 이후,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해 한산도에 본영을 전진시켜 해협 건너편의 거제도를 감시하는 위치에 있었다. 강화 협상이 결렬되고, 경장의 역을 위해 부산 부근에 도해(渡海)·집결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조선 수군의 사령관(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수군 단독으로 침공 공격하는 것에 위험을 느껴 소극적이었고, 당쟁의 영향과 원균의 참소도 있어 단죄되어 지위를 박탈당한 데다가 백의종군(一兵卒이 되어 죄를 갚기 위해 종군하는 것)을 명받았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것은 원균이었지만, 그 역시 공격 명령에 대해 소극적이었다.6월 18일, 마침내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령에 의해 원균은 함대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6월 19일, 안골포와 가덕도에 침공한 함대가 일본군과 해전을 벌여 간부가 부상하는 등의 피해를 입고 일단 한산도까지 후퇴했다. 원균의 함대는 7월 초순에 명령대로 함대를 둘로 나누어 다시 출격하여, 경장 2년(1597년) 7월 7일, 급수를 위해 가덕도에 상륙했는데, 고하시 무네마스·쓰쿠시 히로카도 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했다. 이를 본 도원수(조선군의 최고 사령관) 권율은 원균을 엄하게 질책하고 장벌에 처했다고 한다.
7월 14일, 거듭 한산도 본영을 출격하여, 15일 밤에는 거제도와 칠천량 (현·칠천도) 사이의 칠천량에 정박했다. 이 정보를 얻은 일본군은 수륙에서 협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16일 새벽부터 도도 다카토라 등 일본 수군은 해상에서 공격하고, 육상 부대가 이를 원호했다. 전투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압도하여, 수천 명을 베고, 그 외 다수를 바다에 떨어뜨리고, 160여 척을 포획, 진진포포(津々浦浦) 15~16리에 걸쳐 해적선을 모조리 소각했다(『시마즈 가문 문서』).[1] 조선 수군의 주장 중 원균, 이억기, 최호는 전사하고, 단 한 명 배설만이 도주하여, 조선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육해에서 전라도를 향해 진격해 간다.
5. 3.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는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가져왔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으며, 그 영향은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우선,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조선 수군의 궤멸을 의미했다. 이는 이순신이 오랜 기간 동안 쌓아 올린 해상에서의 우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일본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라도를 향해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이 패배는 조선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매우 컸기 때문에, 칠천량에서의 패전 소식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백성들은 큰 상실감과 함께 앞으로 닥칠 전쟁의 참화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정치적으로는 원균을 비롯한 지휘부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높아졌다. 권율이 원균에게 장벌을 내렸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패전에 대한 책임 추궁과 함께 조선 조정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은 한국인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국방력 강화와 자주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이라는 영웅적 인물의 재조명과 함께, 위기 상황에서 올바른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사례로 인식된다.
참조
[1]
웹사이트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
http://www.idomin.co[...]
[2]
기록
선조실록
선조실록
[3]
웹사이트
원균이 수륙의 병공을 처치해 줄 것을 요청하다
http://sillok.histor[...]
선조실록
1597-06-11
[4]
웹사이트
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http://sillok.histor[...]
선조실록
1597-04-19
[5]
웹인용
체찰사 이덕형과 국방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601-01-17
[6]
문서
[7]
문서
해소실기
[8]
문서
[9]
서적
임진왜란 해전사
http://book.daum.net[...]
청어람미디어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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